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튀르크 전쟁 (문단 편집) ==== 제2차 부더 공방전 (1686년) ==== 1686년 6월 12일, 독일인-헝가리인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서 모인 8만 신성동맹군은 도나우강을 건너 부더로 향하였다. 에스테르곰을 지난 연합군이 15일 비셰그라드에 당도하자 현지 오스만 주둔군이 도주하였고, 지휘관 샤를은 포로 심문을 토해 부더에 1만 5천 수비대가 배치된 것을 깨달았다. 17일에 연합군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소개된 페슈트에 입성한 후 포위를 준비하였다. 부더에서는 총독 압둘라흐만 압디 파샤가 외성, 이스마일 파샤가 내성을 수비하였다. 오스만 지도부는 성벽을 보강, 성벽 외부에 지뢰를 매설하였으며 포격 시의 화재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성 내부 주택들의 지붕을 허물었다.[* 이는 수십년 전 [[칸디아]] 공방전에서 베네치아 수비대가 썼던 방법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대규모 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버틴 후 포위군을 역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다. 6월 24일 포위군은 부더의 외성을 장악하였고, 헝가리 군은 체플 섬에서 오스만 보급 선단을 격파하고 승조원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7월 1일, 포격과 함께 본격적인 포위가 시작되었다. 7일에는 갱도 작전이 개시되었고 13일부터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7월 중순에 이르면 성벽 곳곳에 균열이 생겼지만 다음날 수비대가 복구하였다. 그러던 15일 오스만 수비대가 포위측 갱도를 야습하였고, 22일에도 반복하여 4개의 대포를 빼앗았다. 한편 20일 포위군은 수비측 시파히 기병대를 밖으로 유인한 후 격파하여 그 파샤를 전사시켰고, 22일엔 마차시 궁전 옆의 화약고에 포탄을 명중시켜 1천이 넘는 사망자를 내었다. 한편 그랜드 와지르 사르 쉴레이만 파샤 휘하의 원군이 외세크에 당도한 후 부더에 전갈을 보내었는데 헝가리 기병대가 이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25일에는 포위 도중 최대 규모의 수비대가 남과 북쪽에서 동시에 성밖으로 나와 공격에 나섰고 포위 측과 서로 큰 피해를 주고받은 후 철수하였다. 27일 헝가리 기병대가 대폭발로 붕괴된 강변 성벽을 공격, 격퇴되었으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30일 포위 측은 오스만 사령부에 항복하면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겠지만 계속 저항한다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비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 통보하였으나 거부되었다. 한편 23일부터 8월 초까지 약 1만에 달하는 헝가리 증원 병력이 포위망에 합류하였다. 8월 1일 오스만 원군의 접근 소식에 포위군은 포위망을 두른 성벽을 건설하였고, 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도시를 점령하려는 의도로 3일에 총공격을 시도하였다. 2개월에 걸친 공성전 끝에 포위군은 사상자 및 질병 등으로 실질적으로 활용 가능한 인원이 4만 정도로 축소되었다. 원군에 대한 공격, 철수 등을 놓고 궁리하던 신성도맹 지도부는 오스트리아측 원군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8일부터 오스만측 원군의 선발대과 포위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고, 12일 쉴레이만 파샤 휘하 본대가 에르드에 당도하였다. 한편 10일 하트반에서 출정한 오스만 원군은 헝가리 군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14일 쉴레이만 파샤는 포위망에 공세를 퍼부었고, 부더의 시파히 기병대도 베오그라드 문을 나서 협공에 나섰다. 이들은 크로아티아-헝가리 기병대를 몰아붙였으나 제국군의 지원을 받은 헝가리 군이 반격에 성공하였다. 기세를 얻은 연합군은 2만의 병력으로 참호를 나와 돌격하였고, 쉴레이만 파샤는 철수하였다. (부더커시 전투) 오스만 원군은 대부분 젊고 경험이 부족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쉴레이만 파샤는 섣불리 대규모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20일 새벽 1천의 오스만 기병대가 포위망을 뚫고 부더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저지되었다. 22일 포위군은 남쪽 성벽에 공세를 펼쳐 이슈트반 성탑을 장악하였다. 29일은 [[베오그라드|벨그라드]] 정복, 모하치 전투, 부더 입성 등 16세기 헝가리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여러 승리가 기록된 날이었다. 이날 1천 시파히와 2천 예니체리 부대가 포위망을 공격하였으나 소수만이 성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날 2천의 에르데이 공국 병력이 포위망에 합류하자 샤를은 포위를 풀고 원군과 전면전에 나선다는 소식을 퍼뜨린 후, 9월 2일 아침 북을 울리며 쉴레이만 파샤의 군대와 대치하였다.[* 사실 포위군 측 첩자가 북소리를 통해 수비대에게 다음날 포위군이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를 알려주었기에 수비대는 효과적으로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다] 얼마후 참호로 돌아간 연합군은 오후 3시, 6문의 대포를 3차례 발사하는 신호탄과 함께 부더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다. 샤를은 6천 병력과 북쪽 성벽을 공격하였고, 헝가리 병사들이 성벽에 깃발을 내걸자 사기가 고취되었다. 포위군이 원군과 대치한다 여기고 휴식을 취하던 수비대는 뒤늦게 낮잠에서 일어나 방벽으로 향하였으나 이미 전황은 기운 상태였다. 한편 남쪽 성벽에서는 3천의 바이에른 부대가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지휘 하에 공격하였으나 북쪽 성벽과 달리 수비대의 맹렬한 저항에 막혔다. 그러던 오후 5시 무렵 북쪽 성벽의 빈 성문이 돌파되었다. 연합군은 시내로 몰려들어왔고, 부더의 지휘관 압둘라흐만 파샤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시내 중심부의 헤스 언드라시 광장에서 최후의 돌격을 가한 후 전사하였다. 이로써 145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부더 지배가 종식되었다. 부더는 연합군에게 3일간 약탈되었고, 전리품에 눈이 먼 용병들은 시내의 모든 집에 방화하였다. 주민들은 폭력에 노출되었고, 특히 오스만 측에 협조하여 도시를 방어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유대인 구역이 전소되고 시나고그의 문서들은 불태워졌다. 당대의 사가는 1천 탈러를 지불한 수백의 유대인만이 살아남았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이탈리아의 [[파도바]] 등 유럽 각지에선 반유대 폭동이 발발하였다. 대대적으로 파괴된 부더의 재건은 한세기가 걸렸고, 포위군은 4만의 인명 손실을 내었다. 점령군이 살인과 약탈에 치중하던 틈에 쉴레이만 파샤는 벨그라드를 향해 철수하였고, 샤를은 약탈이 끝난 6일에야 6천 헝가리 기병을 보내 추격하게 하였지만 별 타격을 입히진 못하였다. 다만 여러 전선의 전쟁에 시달리던 오스만 제국은 제한된 병력을 소수의 거점 도시에 집중시키는 패착을 저질렀고, 헝가리-제국군은 방치된 성채들을 점령하며 도시들을 봉쇄한 결과 어렵지 않게 수비대의 항복을 이끌어내었다. 이후 1687년 12월 17일에 신성 로마 제국군이 [[에게르]]를 점령했고 6백여 튀르크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